[Culture]클래식 입문기 2: 나만의 향을 고르듯 클래식 취향 알아가기

27 Sep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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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에 맞는 클래식을 찾아봐요, 내 마음에 드는 향을 찾듯이


나에게 맞는 향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우선 인기있고 잘 알려진 향부터 다양한 향을 경험하는 방법 밖에는 없을 거예요. 수많은 브랜드와 향을 경험하다 보면, 내 머릿속에서 나름 향에 대한 분류체계가 생기면서 내가 선호하고 싫어하는 계열이 무엇인지, 나아가 좋아하는 향료와 잘 맞지 않는 향료가 무엇인지까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결국에는 향 노트만 보고도 어떤 느낌일지 유추할 수 있게 되죠.


어려워 보이는 클래식 음악도 이렇게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영화나 드라마의 명장면, 평소 스쳐가듯 들었던 음악, 나도 모르게 감탄한 광고 속 클래식부터 만나보는 거예요. 원래 취향은, 사소한 계기로 발견하고 넓어지는 거니까요.



신화부터 블랙핑크까지, 생각보다 케이팝과 친한 클래식


케이팝을 듣다 보면 익숙한 멜로디가 들릴 때가 있는데요. 역사적으로 유명한 클래식 악곡을 샘플링(sampling)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샘플링은 이미 존재하는 곡의 일부를 빌려와서 가공하는 작업인데요. 최근 케이팝 중에서 클래식 음악을 샘플링한 곡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케이팝 아티스트들은 오래전부터 클래식에서 영감을 얻어 왔어요. H.O.T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멜로디를 응용한 ‘빛’으로, 신화는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를 샘플링한 ‘T.O.P’로 많은 사랑을 받았죠. 1994년 최고 히트곡인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은 파헬벨의 ‘카논’을, 이현우는 ‘헤어진 다음날’에서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2악장을 활용했고요. 박지윤은 ‘카르멘’을 샘플링한 ‘달빛의 노래’를, 록 밴드 넥스트(N.EX.T)는 구스타브 홀스트의 행성 중 ‘화성 1악장’을 재해석한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2000년대 중반 들어 빠른 박자의 신나는 음악이 트렌드가 되면서, 클래식 샘플링은 덜 주목 받았습니다.

 

2020년대 들어 고전 음악 샘플링이 다시 활발해진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유명 음악가들의 곡은 대부분 저작권이 말소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어요. 클래식 원곡의 이미지를 활용해 아티스트의 색다른 매력을 보여줄 수도 있죠. 클래식에 익숙한 서구권 팬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도 있고요. 이런 장점에 주목해, 케이팝 업계는 아티스트의 세계관이나 콘셉트를 돋보이게 하는 클래식 샘플링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Brown Eyed Girls (브라운아이드걸스) _ Sixth Sense _ MV


Schostakowitsch: 7. Sinfonie (»Leningrader«) ∙ hr-Sinfonieorchester ∙ Klaus Mäkel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Sixth Sense’는 빌보드가 선정한 ‘2010년대 최고의 케이팝 100곡’ 22위에 오르기도 했는데요. 현악기 세션과 멤버들의 보컬, 금관악기 연주가 어우러져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당시에는 호불호가 갈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유와 저항’을 표현한 가사와 뮤직비디오가 재평가 받았어요. 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과 싸우던 조국의 승리를 기원한 쇼스타코비치의 멜로디가 잘 어울리는 이유입니다.



AKMU - '오랜 날 오랜 밤 (LAST GOODBYE)' M/V   


Pachelbel Canon in D Major - the original and best version.



동뮤지션의 두 번째 정규 앨범 수록곡입니다. 이찬혁과 이수현 남매의 호흡이 특히 잘 맞는 곡인데요. 중간중간 익숙한 멜로디는 우리 모두 한 번은 들어봤을 ‘요한 파헬벨의 카논’을 응용한 것입니다. 악동뮤지션은 발랄한 카논 멜로디를 따뜻하면서도 애틋한 느낌으로 재해석했는데요. 여러분 마음속에 노을 지는 가을 풍경을 그려줄 악뮤의 음악 속 카논 선율을 찾아보세요.



Red Velvet 레드벨벳 'Feel My Rhythm' MV


Air on the G String (Suite No. 3, BWV 1068) J. S. Bach, original instruments


한국대중음악상 2023 최우수 케이팝 후보에 지금도 챌린지 소재로 쓰일 정도로 사랑받고 있는데요. 바흐의 명곡 ‘G선상의 아리아’ 전체를 샘플링해, 신선한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후 발매된 블랙핑크의 ‘Shut Down, (여자)아이들의 ‘Nxde’ 등 케이팝의 클래식 샘플링 트렌드를 시작한 곡이죠. ‘Feel My Rhythm’을 다시 들어보면, 바흐의 음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BLACKPINK - ‘Shut Down’ M/V


[손열음 Yeol Eum Son] Liszt: La campanella 리스트: 라 캄파넬라


블랙핑크의 강렬한 보컬과 바이올린 선율에는‘악마적인 천재’로 이름을 알린 파가니니의 화려한 멜로디가 한몫합니다. 반복적이고 날카로운 파가니니의 곡은 힙합 비트로 재해석돼, 곡의 개성과 박자감을 살려주는데요. 원곡과 비교해서 들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겁니다. 같은 멜로디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다시 보면 선명하게 들리는, 한국 영화 속 클래식의 순간들

좋아하는 영화를 반복해서 보면, 명장면이 그림처럼 기억되죠. 그 순간의 음악도 익숙해지고요. 그런 음악 중에 클래식의 비중이 생각보다 클 거예요. 웅장한 오케스트라부터 서정적인 현악기의 선율까지. 클래식 음악은 다양한 모습으로 영화를 빛내 왔거든요. 때로는 주제를 암시하고, 때로는 등장인물의 마음을 표현해 주는 스크린 속 클래식을 소개합니다.



1. <8월의 크리스마스>(1998) → 빌라 로보스 ‘브라질 풍의 바흐 5번 1악장 칸틸레나’



배우 한석규와 심은하의 명연기, 잔잔해서 더 인상적인 연출로 ‘한국 멜로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입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가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라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일상을 비추듯 차분하게 묘사해 굉장히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당시 칸 영화제에도 초청될 정도로 해외에서도 주목했죠. 



<8월의 크리스마스>의 명장면은 ‘다림’을 사랑하지만,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알며 슬픔을 삭이는 ‘정원’을 보여주는데요. 이 장면에 브라질 작곡가 빌라 로보스(Hector Villa-Lobos)의 음악이 쓰였습니다. 그는 이 곡에 평생 존경하던 바흐의 음악적 양식과 브라질 민요의 특징을 결합했는데요. 애써 슬픈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선율이 영화 속 ‘정원’의 마음처럼 들려, 많은 사람에게 인상적인 순간으로 남았습니다.




2.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 → 쇼팽 ‘이별의 노래’



공지영 작가가 2005년 발표한 소설을 영화화한 2006년 작품입니다. 교수이자 유명한 가수였지만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한 ‘유정’이, 수녀인 고모를 따라간 교도소에서 사형수 ‘윤수’를 만나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렸는데요. 1주일에 한 번, 3시간씩 만나게 된 둘은 마음속 상처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행복과 사랑을 꿈꾸죠. 그러나 점점 가까워지는 사형 집행일. 두 사람은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화는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과 그런 감정을 나누길 원한다’는 소설의 주제의식을 담담하게 그려내 호평받았는데요. ‘윤수’의 범행 현장과 ‘유정’의 자살 시도를 보여주는 영화 도입부에, 쇼팽의 곡이 실렸습니다. 첫사랑을 그리워하면서도, 함께할 수 없다는 괴로움을 담은 ‘이별의 노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처지와 똑 닮았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기에, 관객들의 기억에 깊이 남았는지도 몰라요.



3. <검은 사제들>(2015) → 바흐 칸타타 140번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최근 천만 관객을 기록한 <파묘> 장재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한데요. ‘악마를 물리치는 사제’라는 독특한 소재,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기대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미스터리하면서도 신비한 OST도 화제가 됐어요. 




바흐의 음악은 ‘김 신부’와 ‘최 부제’가 한 소녀에게 빙의한 악마를 쫓아내는 장면에서 쓰였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바흐는 음악도 일종의 설교라고 생각해, 자기 작품에 다양한 성경적 요소를 넣었다고 해요. 칸타타 140번은 성령의 강림, 예수를 기다리는 성도들을 위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입니다. 소녀에게 깃든 악마가 이 음악을 듣고 분노한 것도 그런 이유였죠. 음악을 단순한 배경으로 생각하지 않고, 내용 전개의 요소로 활용한 감독의 꼼꼼함이 돋보입니다.



4. <아가씨>(2016) → 모차르트 ‘클라리넷 5중주 2악장 라르게토’



박찬욱 감독의 10번째 작품으로, 그림 같은 연출과 파격적인 배우들의 연기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영화 <올드보이>, <박쥐> 등의 음악을 책임진 조영욱 음악감독의 OST도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요. 미국 영화 미디어 인디와이어(Indiewire)는 ‘올해 최고의 사운드트랙’ 1위로 <아가씨>의 OST를 선정하기도 했어요. 같은 해 개봉한 <라라랜드(La La Land)>보다도 높은 순위여서 더 의미 있었죠. 


모차르트의 음악은 영화 중후반부, 귀족 아가씨 ‘히데코’와 일본인 백작 행세를 하는 ‘후지와라’의 식사 장면에서 흘러나옵니다. ‘히데코’는 하녀인 ‘숙희’와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지만, ‘숙희’가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데요. 이후 ‘히데코’가 ‘후지와라’의 청혼을 반강제로 받아들이는 순간을, 모차르트의 클라리넷이 장식합니다. 



모차르트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요. 그럴 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친구가 클라리넷 연주자, 안톤 슈타틀러(Anton Stadler)였습니다. 그런 안톤을 위해 모차르트는 클라리넷 5중주곡을 헌정했죠. 그중 2악장은 특히 평화롭고 잔잔한 곡인데요. 엇갈린 길을 갈 수밖에 없지만, 마음만은 함께하고 싶은 ‘히데코’와 ‘숙희’의 마음을 잘 표현해 줍니다.  


케이팝부터 영화까지, 클래식은 다양한 모습으로 현대 관객들을 맞이합니다. 이번에 소개한 노래와 영화들 이외에도, 클래식이 스며든 작품들이 참 많은데요. 좋아하는 작품이 있다면 작품에 사용된 클래식부터 가볍게 감상해보세요. 그러다 같은 작곡가의 다른 곡들을 찾아보는 거에요. 내 맘에 드는 향기를 찾는 것 처럼, 클래식의 취향에도 정답은 없습니다.


Sometimes you win, 

Sometimes you lea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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