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볼 것도 많은 대형서점, 주인의 취향이 담긴 개성있는 독립서점과 북카페 등 책을 다루는 다양한 공간이 많은데요, 정작 도서관은 10대 시절 공부할 때 이후로는 거의 찾아간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서점은 상품을 팔고 구매하는 상점의 느낌이 강하다면, 도서관은 인생에서 목마름을 느낄 때 찾게되는 개울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도서관에 간다'는 그랑핸드 주변부터 시작해 서울에 있는 도서관을 한 곳씩 방문해서 살펴보는 탐방기입니다. 첫번째 소개해드릴 도서관은 청운동에 위치한 ‘청운문학도서관'입니다.
방문했던 날은 9월 초, 하늘은 높아졌지만 아직 기온은 따뜻해서 걷기에 딱 좋았던 날이었습니다. 청운동에 위치한 청문문학도서관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경복궁역이에요. 대중교통 이용시 7212번 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에서 하차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지만 저희는 걸어갔답니다.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자하문터널 방향으로 직진)
날씨가 맑아서 모든 게 선명하게 보였던 날. 인왕산이 코 앞에 있는 것 같아요.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예전 그랑핸드 서촌점 2층이 오피스였을 때 가끔 가던 식당들을 만났습니다. 블루베리(?) 잔치국수와 아침회의가 끝나자마자 달려가야 먹을 수 있었던 중국.
한참을 올라와서 무심코 뒤를 돌아봤는데 길이 무척 예뻤어요.
경기상고를 지나 바로 우측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고급 주택들이 펼쳐지며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 평일이라 인적도 없어서 한국이 아닌 외국의 낯선 동네에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또 한참 올라와서 뒤 돌아보니 이번에는 북악산의 정기가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고급 주택이 많은 이유가 정말로 있나 봅니다. 청운동의 뜻이 ‘맑은 구름이 걸린 동네'이듯 지대가 높은 편이라, 여름에 걸어서 오기에는 조금 더울 것 같습니다. 멋진 집들(담벼락)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괜히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지 상상해봅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길까지 조경이 완벽하게 되어있는 모습.
그렇게 동네를 구경하며 걷다보면 갑자기 나타나는 청운문학도서관. 우리가 평소 아는 도서관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청운문학도서관은 한옥으로 지어진 종로구 문학특성화 도서관이에요. 독서와 사색, 휴식이 가능한 매력적인 공간으로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말 그대로 ‘선비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문학특성화 도서관인만큼 시, 소설, 수필 위주의 다양한 문학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국내 문학 작품 및 작가 중심의 기획전시와 인문학 강연, 시 창작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1층은 현대식 건물로 열람실과 사무실, 화장실 등이 있고, 2층은 한옥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열람실 내부의 모습. 아무래도 문학특성화 도서관이다보니 일반적인 도서관에 비하면 규모는 작은 편입니다.
휴가철 추천 도서 큐레이션
멜로 영화보면 꼭 이런 구도 있드라..
청운문학도서관의 특징 중 하나는 성큰 가든이 있다는 점이었어요. 열람실에서 연결된 공간이라 이 곳에서 책을 읽어도 좋고, 책을 읽다 잠시 나와 사색을 즐기기에도 좋습니다. 높은 대나무가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해주어 아늑함이 느껴졌어요.
오늘 고른 책은 『천국은 있다』입니다. 시인 허연의 동료이며 독자인 다섯 명의 시인과 평론가가 엮은 시선집으로 동료들이 뽑은 허연의 시 60편에 근작시 12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근작부터 역순으로 되어 있어 읽을수록 허연 시의 기원을 찾는 여정이 됩니다.
사실 허연이라는 시인도 알지 못했고 책 제목도 잘못 읽어서(천국은 없다..)고른 책인데, 엄청난 흡입력에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고 왔습니다. 시집이라서 그런지 금방 읽히더라구요. 추미의 경계에 있는 그의 작품은 어둡고 쓸쓸한 현실 속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생과 사의 본질적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느껴져서 참 좋았습니다. 아래 몇 가지 작품을 소개합니다.
1. 슬픔에 슬픔을 보탰다
수도원에서 도망쳤다
신을 대면하기엔
나는 단어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짐을 싸들고 욕망이 쏟아져 내려오던
비탈길을 내려왔다
모든 걸 다해
단 몇 줄로 정리된 나를
바치고 싶었지만
반찬도 없이 식은 밥을 먹으며
구멍 난 튜니카를 꿰매며
잊혀도 좋으니 거룩하고 싶다고
천 번을 되뇌었지만
그레고리안 성가가 안개처럼 흘러 다니는 산길을
버렸던 단어들을 하나씩 주워 담으며
내. 려. 왔. 다.
고통받는 삶의 형식이 필요했다
시를 쓰면서
슬픔에 슬픔을 보태거나
죽음에 죽음을 보태는 일을 했다
2. 십일월
십일월의 나는 나쁘게 늙어가기로 했다
잊고 있었던 그대가
잠깐 내 안부를 들여다본 저녁
창문을 열면
늦된 날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절망의 형식으로 이 작은 아파트는 충분한 걸까
한참을 참았다가
뺨이 뜨거워졌다
남은 것들이 많아서 더 슬펐다
낙타가 몇 번 몸을 접은 후에야
간신히 땅에 쓰러지듯
세월은 힘겹게 바닥에 주저앉아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 서쪽으로는
노을이 재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육군 00사단 교육대
기다란 개인 소총을 거꾸로 들고
내 머리통을 겨누었다
십일월이었다
어머니 도와주세요
미친 듯이 슬펐는데 단풍은 못되게 아름다웠다
신전 같은 산 그늘이 나를 덮었고
난 죽지 못했다
늙고 좋은 놈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젊었을 때만 좋았다
십일월이 그걸 알려줬다
3. 새벽 1시
바람이 부는 게
왜 나에게 아픔이 되었는지
아픔은 왜 다시 바람이 되었는지
당연한 이야기를 되묻는 시간
누군가는 영양 한 마리를 쫓고
누군가는 골 세레모니를 하고
누군가는 마약성 진통제를 맞는 시간
소문이 날개를 달고 누군가의 생을 저미는 시간
죽 한 그릇이 누군가를 살리고
사랑이 빵처럼 구워지는 시간
바람이 왜 불지
기억하지 않는 게 좋아
창문은 꼭 잠그고 가능하면 불도 끄는 게 좋아
어떤 대륙은 폭우에 씻겨 나가고
어떤 세월은 날 죽이려고 흘러가고
또 어떤 하느님은 돌아오지 않는 시간
한쪽 다리 없이 뛰어다녔던 청년이 별을 보는 시간
여기저기서 죄를 사하고
한 공기의 늦은 밥을 푸는 시간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당신은 모르지
내일에도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지
바람이 분다
새벽 1시의 바람이 분다
4. 계급의 목적
옷을 입으면서 인간은 불행해졌다. 계급이 생긴 거다. 계급은 도시에 더 많다. 계급은 커피에도 삼겹살에도 있다. 계급에 따라 신호등이 켜지고, 엘리베이터도 계급에 멈춰 선다. 계급은 준엄하다. 계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잘 닦인 구두에 짓밟힌다. 밟히면 계급에 더 빨리 취한다. 아이러니다.
이곳에선 악마의 이름에도 계급이 매겨진다. 사람들은 계급을 얻기 위해 고향을 떠나 길 위에서 빵을 먹는다. 버스 노선을 외우고 밤마다 모텔들에 불이 훤하고 계급은 잠들지 않는다. 계급은 좋은 점이 하나 있다. 옷을 벗으면 잠시 사라진다.
5. 난분분하다
안 가 본 나라엘 가 보면 행복하다지만, 많이 보는 만큼 인생은 난분분亂紛紛할 뿐이다. 보고 싶다는 열망은 얼마나 또 굴욕인가. 굴욕은 또 얼마나 지독한 병변인가. 내 것도 아닌 걸, 언젠가는 도려내야 할 텐데. 보려고 하지 말라. 보려고 하지 말라. 넘어져 있는 부처의 얼굴을 꼭 보고 말아야 하나. 제발 지워지고 묻혀진 건 그냥 놔두라.
가장 많이 본 사람은 가장 불행하다. 내 앞에 있는 것만 보는 것도 단내 나는 일인데. 땅속에 있는 전설을 보는 자들은 무모하다. 눈으로 보아서 범하는 병.
끌려 나온 물고기가 눈이 튀어나온다.
책을 읽고 한옥이 있는 2층에 올라가봅니다. 한옥에서는 비치된 책만 열람할 수 있으며 1층 열람실의 책은 대출을 해야만 2층으로 들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계단에서부터 물소리와 새소리가 들려서 올라가기 전부터 설레기 시작합니다.
2층에 마련된 한옥. 이 안에도 책 몇 권이 비치되어 있어 빈손으로 가도 독서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속으로 계속 감탄했던 내부의 모습. 너무 멋있지 않나요? 특히 이 날은 날씨가 좋아 모든 문을 개방해서 훨씬 운치있었어요. 명당인 창가쪽에는 이미 한 둘씩 자리를 잡고 각자의 세상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 또한 참 보기 좋았습니다. 다들 여긴 어떻게들 알고 오신건지,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왜 우리만 몰랐는지 신기해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사방이 막힌 콘크리트 속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빛의 색과 밖에서 들리는 물 소리, 한옥 특유의 나무 냄새까지 기분좋은 낯설음에 설레면서도 차분해짐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그리고 청운문학도서관의 백미는 이 폭포가 있는 정자이지 않을까 싶어요. 열어 젖힌 창 밖으로 계단식 폭포가 흘러내려 이 공간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합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서.. 이 도서관의 유일한 단점은 매점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 자판기가 유일한 매점이에요. 심지어 카드도 안되고 현금은 1,000원짜리 밖에 사용할 수 없답니다!! 방문하실 분들은 미리 간식거리나 천원짜리 지폐를 준비해주세요.
청운공원의 관리소로 쓰이던 낡은 건물이 인왕산의 능선과 사계절의 자연풍광을 그대로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전통 한옥으로 탈바꿈하여 시민들에게 문학을 즐길 수 있는 선비의 정원으로 재탄생한 이 곳 청운문학도서관은 서촌에 방문하신 분들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처음 탐방했던 날은 평일이라 도서관에 사람이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주말에 한 번 더 방문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셔서 책도 읽으시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어요. 또 때마침 세미나가 막 끝났는지 한옥에서 많은 분들이 나오시는 걸 보며 다시 한 번 이 좋은 곳을 우리만 몰랐었구나.. 역시 좋은 곳은 아는 사람은 다 아시는 구나.. 생각했답니다. 다음에 소개해드릴 도서관도 기대해주세요.
청운문학도서관
주소: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36길 40
운영시간: 화-일 10:00 ~ 19: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1, 설 연휴, 추석 연휴
주차: 청운공원화장실(서울 종로구 청운동 7-27) 기준으로 좌회전 유턴 후 샛길로 내려오면 4대 정도 주차 가능한 주차장이 나오며
청운문학도서관 한옥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화려하고 볼 것도 많은 대형서점, 주인의 취향이 담긴 개성있는 독립서점과 북카페 등 책을 다루는 다양한 공간이 많은데요, 정작 도서관은 10대 시절 공부할 때 이후로는 거의 찾아간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서점은 상품을 팔고 구매하는 상점의 느낌이 강하다면, 도서관은 인생에서 목마름을 느낄 때 찾게되는 개울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도서관에 간다'는 그랑핸드 주변부터 시작해 서울에 있는 도서관을 한 곳씩 방문해서 살펴보는 탐방기입니다. 첫번째 소개해드릴 도서관은 청운동에 위치한 ‘청운문학도서관'입니다.
방문했던 날은 9월 초, 하늘은 높아졌지만 아직 기온은 따뜻해서 걷기에 딱 좋았던 날이었습니다. 청운동에 위치한 청문문학도서관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경복궁역이에요. 대중교통 이용시 7212번 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에서 하차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지만 저희는 걸어갔답니다.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자하문터널 방향으로 직진)
날씨가 맑아서 모든 게 선명하게 보였던 날. 인왕산이 코 앞에 있는 것 같아요.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예전 그랑핸드 서촌점 2층이 오피스였을 때 가끔 가던 식당들을 만났습니다. 블루베리(?) 잔치국수와 아침회의가 끝나자마자 달려가야 먹을 수 있었던 중국.
한참을 올라와서 무심코 뒤를 돌아봤는데 길이 무척 예뻤어요.
경기상고를 지나 바로 우측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고급 주택들이 펼쳐지며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 평일이라 인적도 없어서 한국이 아닌 외국의 낯선 동네에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또 한참 올라와서 뒤 돌아보니 이번에는 북악산의 정기가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고급 주택이 많은 이유가 정말로 있나 봅니다. 청운동의 뜻이 ‘맑은 구름이 걸린 동네'이듯 지대가 높은 편이라, 여름에 걸어서 오기에는 조금 더울 것 같습니다. 멋진 집들(담벼락)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괜히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지 상상해봅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길까지 조경이 완벽하게 되어있는 모습.
그렇게 동네를 구경하며 걷다보면 갑자기 나타나는 청운문학도서관. 우리가 평소 아는 도서관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청운문학도서관은 한옥으로 지어진 종로구 문학특성화 도서관이에요. 독서와 사색, 휴식이 가능한 매력적인 공간으로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말 그대로 ‘선비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문학특성화 도서관인만큼 시, 소설, 수필 위주의 다양한 문학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국내 문학 작품 및 작가 중심의 기획전시와 인문학 강연, 시 창작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1층은 현대식 건물로 열람실과 사무실, 화장실 등이 있고, 2층은 한옥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열람실 내부의 모습. 아무래도 문학특성화 도서관이다보니 일반적인 도서관에 비하면 규모는 작은 편입니다.
휴가철 추천 도서 큐레이션
멜로 영화보면 꼭 이런 구도 있드라..
청운문학도서관의 특징 중 하나는 성큰 가든이 있다는 점이었어요. 열람실에서 연결된 공간이라 이 곳에서 책을 읽어도 좋고, 책을 읽다 잠시 나와 사색을 즐기기에도 좋습니다. 높은 대나무가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해주어 아늑함이 느껴졌어요.
오늘 고른 책은 『천국은 있다』입니다. 시인 허연의 동료이며 독자인 다섯 명의 시인과 평론가가 엮은 시선집으로 동료들이 뽑은 허연의 시 60편에 근작시 12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근작부터 역순으로 되어 있어 읽을수록 허연 시의 기원을 찾는 여정이 됩니다.
사실 허연이라는 시인도 알지 못했고 책 제목도 잘못 읽어서(천국은 없다..)고른 책인데, 엄청난 흡입력에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고 왔습니다. 시집이라서 그런지 금방 읽히더라구요. 추미의 경계에 있는 그의 작품은 어둡고 쓸쓸한 현실 속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생과 사의 본질적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느껴져서 참 좋았습니다. 아래 몇 가지 작품을 소개합니다.
1. 슬픔에 슬픔을 보탰다
수도원에서 도망쳤다
신을 대면하기엔
나는 단어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짐을 싸들고 욕망이 쏟아져 내려오던
비탈길을 내려왔다
모든 걸 다해
단 몇 줄로 정리된 나를
바치고 싶었지만
반찬도 없이 식은 밥을 먹으며
구멍 난 튜니카를 꿰매며
잊혀도 좋으니 거룩하고 싶다고
천 번을 되뇌었지만
그레고리안 성가가 안개처럼 흘러 다니는 산길을
버렸던 단어들을 하나씩 주워 담으며
내. 려. 왔. 다.
고통받는 삶의 형식이 필요했다
시를 쓰면서
슬픔에 슬픔을 보태거나
죽음에 죽음을 보태는 일을 했다
2. 십일월
십일월의 나는 나쁘게 늙어가기로 했다
잊고 있었던 그대가
잠깐 내 안부를 들여다본 저녁
창문을 열면
늦된 날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절망의 형식으로 이 작은 아파트는 충분한 걸까
한참을 참았다가
뺨이 뜨거워졌다
남은 것들이 많아서 더 슬펐다
낙타가 몇 번 몸을 접은 후에야
간신히 땅에 쓰러지듯
세월은 힘겹게 바닥에 주저앉아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 서쪽으로는
노을이 재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육군 00사단 교육대
기다란 개인 소총을 거꾸로 들고
내 머리통을 겨누었다
십일월이었다
어머니 도와주세요
미친 듯이 슬펐는데 단풍은 못되게 아름다웠다
신전 같은 산 그늘이 나를 덮었고
난 죽지 못했다
늙고 좋은 놈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젊었을 때만 좋았다
십일월이 그걸 알려줬다
3. 새벽 1시
바람이 부는 게
왜 나에게 아픔이 되었는지
아픔은 왜 다시 바람이 되었는지
당연한 이야기를 되묻는 시간
누군가는 영양 한 마리를 쫓고
누군가는 골 세레모니를 하고
누군가는 마약성 진통제를 맞는 시간
소문이 날개를 달고 누군가의 생을 저미는 시간
죽 한 그릇이 누군가를 살리고
사랑이 빵처럼 구워지는 시간
바람이 왜 불지
기억하지 않는 게 좋아
창문은 꼭 잠그고 가능하면 불도 끄는 게 좋아
어떤 대륙은 폭우에 씻겨 나가고
어떤 세월은 날 죽이려고 흘러가고
또 어떤 하느님은 돌아오지 않는 시간
한쪽 다리 없이 뛰어다녔던 청년이 별을 보는 시간
여기저기서 죄를 사하고
한 공기의 늦은 밥을 푸는 시간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당신은 모르지
내일에도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지
바람이 분다
새벽 1시의 바람이 분다
4. 계급의 목적
옷을 입으면서 인간은 불행해졌다. 계급이 생긴 거다. 계급은 도시에 더 많다. 계급은 커피에도 삼겹살에도 있다. 계급에 따라 신호등이 켜지고, 엘리베이터도 계급에 멈춰 선다. 계급은 준엄하다. 계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잘 닦인 구두에 짓밟힌다. 밟히면 계급에 더 빨리 취한다. 아이러니다.
이곳에선 악마의 이름에도 계급이 매겨진다. 사람들은 계급을 얻기 위해 고향을 떠나 길 위에서 빵을 먹는다. 버스 노선을 외우고 밤마다 모텔들에 불이 훤하고 계급은 잠들지 않는다. 계급은 좋은 점이 하나 있다. 옷을 벗으면 잠시 사라진다.
5. 난분분하다
안 가 본 나라엘 가 보면 행복하다지만, 많이 보는 만큼 인생은 난분분亂紛紛할 뿐이다. 보고 싶다는 열망은 얼마나 또 굴욕인가. 굴욕은 또 얼마나 지독한 병변인가. 내 것도 아닌 걸, 언젠가는 도려내야 할 텐데. 보려고 하지 말라. 보려고 하지 말라. 넘어져 있는 부처의 얼굴을 꼭 보고 말아야 하나. 제발 지워지고 묻혀진 건 그냥 놔두라.
가장 많이 본 사람은 가장 불행하다. 내 앞에 있는 것만 보는 것도 단내 나는 일인데. 땅속에 있는 전설을 보는 자들은 무모하다. 눈으로 보아서 범하는 병.
끌려 나온 물고기가 눈이 튀어나온다.
책을 읽고 한옥이 있는 2층에 올라가봅니다. 한옥에서는 비치된 책만 열람할 수 있으며 1층 열람실의 책은 대출을 해야만 2층으로 들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계단에서부터 물소리와 새소리가 들려서 올라가기 전부터 설레기 시작합니다.
2층에 마련된 한옥. 이 안에도 책 몇 권이 비치되어 있어 빈손으로 가도 독서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속으로 계속 감탄했던 내부의 모습. 너무 멋있지 않나요? 특히 이 날은 날씨가 좋아 모든 문을 개방해서 훨씬 운치있었어요. 명당인 창가쪽에는 이미 한 둘씩 자리를 잡고 각자의 세상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 또한 참 보기 좋았습니다. 다들 여긴 어떻게들 알고 오신건지,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왜 우리만 몰랐는지 신기해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사방이 막힌 콘크리트 속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빛의 색과 밖에서 들리는 물 소리, 한옥 특유의 나무 냄새까지 기분좋은 낯설음에 설레면서도 차분해짐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그리고 청운문학도서관의 백미는 이 폭포가 있는 정자이지 않을까 싶어요. 열어 젖힌 창 밖으로 계단식 폭포가 흘러내려 이 공간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합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서.. 이 도서관의 유일한 단점은 매점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 자판기가 유일한 매점이에요. 심지어 카드도 안되고 현금은 1,000원짜리 밖에 사용할 수 없답니다!! 방문하실 분들은 미리 간식거리나 천원짜리 지폐를 준비해주세요.
청운공원의 관리소로 쓰이던 낡은 건물이 인왕산의 능선과 사계절의 자연풍광을 그대로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전통 한옥으로 탈바꿈하여 시민들에게 문학을 즐길 수 있는 선비의 정원으로 재탄생한 이 곳 청운문학도서관은 서촌에 방문하신 분들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처음 탐방했던 날은 평일이라 도서관에 사람이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주말에 한 번 더 방문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셔서 책도 읽으시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어요. 또 때마침 세미나가 막 끝났는지 한옥에서 많은 분들이 나오시는 걸 보며 다시 한 번 이 좋은 곳을 우리만 몰랐었구나.. 역시 좋은 곳은 아는 사람은 다 아시는 구나.. 생각했답니다. 다음에 소개해드릴 도서관도 기대해주세요.
청운문학도서관
주소: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36길 40
운영시간: 화-일 10:00 ~ 19: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1, 설 연휴, 추석 연휴
주차: 청운공원화장실(서울 종로구 청운동 7-27) 기준으로 좌회전 유턴 후 샛길로 내려오면 4대 정도 주차 가능한 주차장이 나오며
청운문학도서관 한옥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