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âneur[플라뇌르]: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 거닐기 좋아하는 (사람), 빈둥거리는 (사람), 만보객
주말에 방문할 동네에서 꼭 가봐야 할 맛집과 카페, 숍들을 미리 검색하고,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돌아다닐 것인지 최적의 동선을 짜고,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어디를 가든 최소 30분은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된 요즘. 즉흥적으로 돌아다니기엔 기다리기만 하다가 하루를 망치기 십상입니다.
쉬는 것마저 점점 고도의 효율을 추구하게 되는 우리의 일상,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요?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쉬는 일에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사전 계획을 짜진 않았던 것 같은데, 더 이상 ‘목적 없는 어슬렁거림’은 실종된 것 같아 보입니다. 최고의 휴일을 완성하기 위해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동안, 그랑핸드는 빈둥거리는 만보객이 되고자 합니다. 도시를 관찰하는 플라뇌르로서 발견한 장소들을 여러분들께 조금씩 소개해 드립니다.
‘서울’ 하면 어떤 이미지가 생각나시나요? 수많은 맛집, SNS에서 유명한 카페,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핫플레이스 등. 많은 이들이 화려한 서울의 면모를 떠올리지만, 사실 서울은 문화재가 밀집된 지역으로 과거랑 현재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특히 종로에는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 받은 건축물들이 다수 있죠. 그동안 비슷한 방식으로 서울을 즐겨 왔다면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들을 찾아 걸어 보는 건 어떨까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 국내 최초 사진 전문 미술관 뮤지엄한미, 조선시대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수성동 계곡까지. 종묘에서 시작해 북촌-삼청동-서촌 일대를 걸어 봤어요.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 종묘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종묘입니다. 종묘는 조선왕조 500년을 이끈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모시는 사당입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종묘에서 제례를 올릴 때 연주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 역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 받았습니다.
종묘 바로 앞에는 버스 정류장과 종로3가역이 있어서 접근성이 좋은 편입니다. 평일 오전 시간에 방문해서 그런지 관람객이 많지 않았는데요. 알고 보니 종묘는 주말만 자유 관람이 가능하다고 해요. 평일에는 문화재 해설사를 동반한 시간제 관람만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신주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사당인 만큼 그 신성함과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운이 좋게도 시간 맞춰 도착한 별다른 대기 없이 입장할 수 있었어요.
종묘 관람 프로그램은 한 시간 정도의 코스입니다. 입장과 동시에 느꼈던 종묘의 첫인상은 ‘차분함'이었어요. 경복궁, 창덕궁 같은 궐과 달리 단청이 소박하고 전체적으로 고요한 느낌이 감도는 장소였습니다. 초입에는 양쪽으로 작은 못이 방문객을 반기는데요. 가운데에 외딴섬처럼 자리한 곳에는 소나무가 아닌, 향나무가 심겨 있었습니다. 다른 궐에서 만날 수 있는 잉어 같은 어류도 없었어요. 이는 제를 위한 장소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해요. 아마 바깥에서 날아왔을 청둥오리들만 연못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의외로(?) 종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에게 있어선 한국에 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 중 하나입니다. 특히 프리츠커 상을 받고 최근에는 루이 비통 메종 서울을 작업한 해체주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종묘는 세계 최고의 건물 중 하나로,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일본 건축가 시라이 세이이치 또한 종묘를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이라 평하기도 했고요. 세계의 많은 건축 권위가들이 최고로 꼽는 한국의 건축물임에도 정작 국내에선 그만큼의 관심을 받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왕궁터라 그런지, 종묘에는 키가 크고 풍성한 나무들이 가득했습니다. 가만히 숨을 들이마시면 신선한 풀 냄새가 났어요. 시간제 관람이라는 특성 덕분에 해설사를 동반한 저희 팀 외 다른 관람객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엄청난 이점이었습니다. 마치 과거로 되돌아가 아무도 없는 종묘를 거니는 기분이었달까요. 몇백 년 전 제례를 위해 이 땅을 밟았을 사람들의 존재가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현재까지도 종묘에서는 매년 실제 제례가 이뤄진다고 합니다. 문화재 해설사는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종묘 행사를 언급하며 ‘종묘는 죽은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공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종묘를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던 신선한 경험이었죠.
종묘 정전은 무척 특이한 건축물 중에 하나입니다. 고정된 모습이 아닌 세월이 지나면서 그 크기가 점차 커졌기 때문이죠. 사실 처음 지었을 때는 7칸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왕조가 이어짐에 따라 모셔야 할 신위가 많아지면서 그 옆으로 증축을 하게 되었다고 해요. 오늘날 종묘 정전은 19신실이 이어져 있습니다. 제가 방문한 날에는 종묘 정전 보수 공사를 진행중이었는데요. 공사가 끝난 뒤에 방문하신다면 19칸으로 길게 늘어진 웅장한 정전을 감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1969년 복원된 이후로 매년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종묘대제가 진행되니 맞춰 방문해도 좋겠습니다.
종묘에는 알고 보면 흥미로운 포인트들이 많았어요. 유명한 것 중의 하나는 가운데 돌길을 ‘신로'라 구분한 것이죠. 조상의 혼령이 다니는 길이라는 의미로, 보행을 자제해 달라는 안내문이 나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신로를 중심으로 왼쪽은 왕세자, 오른쪽은 왕이 걸었다고 합니다. 돌들이 투박하게 깎여 있거나 계단의 폭이 커서, 보행할 때 바닥을 보고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는데요. 이 또한 의도한 부분이라고 해요.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던 종묘지만, 이 길 만큼은 그 세월을 오롯이 통과해 온 듯 합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곳, 오직 조상을 위해 설계된 곳. 배경을 알게 되니 종묘가 더욱 다채로워 보입니다.
종묘 | 서울 종로구 종로 157
시간제 운용
종묘에서 빠져나오니 어느덧 점심시간입니다. 저는 종묘 옆길인 서순라길을 거쳐 북촌에서 점심을 먹는 경로를 택했어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순라길에는 종묘 돌담을 따라 멋진 레스토랑과 술집, 카페가 늘어서 있습니다. 단층짜리 건물들과 고유의 미감을 머금고 있는 가게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답니다. 특히 가을쯤에는 종묘 안에 있는 키 큰 나무들에 단풍이 들면서 잎을 하나둘 떨구는데,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방문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워요. 서순라길을 빠져나오니 멀리 창덕궁이 보입니다. 고궁과 번잡한 도로가 교차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생경한 풍경이에요. 100년 후 서울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최초, 최고의 사진전문 미술관 뮤지엄한미
북촌에서 25분 정도를 걸으면 뮤지엄한미에 도착할 수 있지만,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버스를 이용하길 추천해요. 정독 도서관에서 ‘종로 11’ 버스를 타고 ‘삼청공원 삼거리’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뮤지엄한미가 있습니다. 주택가 사이에 우뚝 선 뮤지엄한미 건물은 그 외관부터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더할 나위 없지요.
뮤지엄한미는 지난해 12월에 개관한 이래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국내 최초 사진 전문 미술관입니다. 전시는 물론 소장품 수집, 작가 지원사업, 출판 및 교육사업을 통해 미술계와 대중의 관심 밖이었던 사진을 연구·보존하고자 탄생했다고 합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사진사에서 중요한 작품 역시 체계적으로 수집해 사진계의 외연을 넓혀가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제가 방문한 시기에는 아쉽게도 본관 재정비로 인해 별관만 관람할 수 있었는데요. 본관에서는 5월 24일부터 9월 17일까지 윌리엄 클라인의 《DEAR FOLKS》 전시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해요.
© 뮤지엄 한미
윌리엄 클라인은 20세기 현대 사진의 거장으로 불리는 미국 사진 작가로, 기존 사진 문법을 완전히 뒤바꿨다는 평을 받는 인물입니다. 뮤지엄한미에서 진행되는 전시는 윌리엄 클라인의 사후 첫 대규모 회고전이라 그 의미가 남다르죠. 전시와 연계해 1층 개방 수장고에서 뮤지엄 한미의 소장품 중 클라인이 생전에 영향을 받았던 워커 에반스의 사진 작품 20여 점을 함께 전시한다고 합니다. 시각예술의 새 흐름을 선도한 윌리엄 클라인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워커 에반스의 작품을 함께 감상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본관 바로 옆에 위치한 별관에 방문했습니다. 별관에서는 정경자 작가의 개인전인 《다른 면》이 진행 중이었어요. 정경자는 피사체의 일부분을 확대해 촬영하거나 이미지의 색을 제거해 구조적인 형태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을 전개하는 작가인데요.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실재인지 허상인지’와 ‘과거와 미래의 나는 과연 현재의 나와 같은 실체인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구체화한 《Uncanny》 연작들이 준비돼 있었어요.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은 주변에서 마주할 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작가가 창조한 새로운 프레임은 사유를 촉진시킵니다.
일상적인 풍경을 비일상적인 프레임으로 구현된 작품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내포한 듯 보입니다. 섬세하게 표현된 그림 같기도 하죠. 사진이라는 파편은 새로운 시선으로 주변부를 바라보게 합니다. 나무에 가지들이 얽힌 모습, 돌의 투박함과 동시에 느껴지는 고요함, 조형 혹은 패턴 그래픽처럼 자리한 패브릭. 제가 특히 좋았던 작품은 바다 사진입니다. 은은한 윤슬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의 색, 전시장 벽체가 어우러져 완성한 평온한 풍경이 인상적이었어요.
작품은 물론 별관의 건축적인 구조도 무척 매력적이었어요. 3층 한쪽 벽은 통창으로 되어있는데, 공간 전체에 쏟아지듯 번지는 빛과 바깥 풍경이 가만히 바라보기에도 좋았습니다.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루프탑이 등장합니다. 산이 감싸고 있는 듯한 동네의 아늑함이 잘 느껴지는 공간이었어요. 그동안 알고 있었던 종로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뮤지엄한미 청담 | 서울 종로구 삼청로9길 45
수~일 10:00~18:00
시원한 바람이 있는 수성동 계곡
뮤지엄한미에서 택시를 타고 수성동 계곡이 있는 서촌으로 이동합니다. 사진으로는 미처 남기지 못했지만, 택시 안에서 바라본 종로 일대는 무척 낭만적이었어요. 높은 건물이 없어서 그런지 청명한 하늘이 잘 보였을 뿐만 아니라 북악산이 보이는 위치라 자연을 만끽하기에도 좋더라고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청와대와 통인동을 지나 서촌 안쪽으로 진입합니다.
이때 오랜 세월 서촌을 오가셨던 택시 기사님은 더 이상 자신이 알던 도로와 옛집들의 흔적이 없는 것에 대해 한탄했는데요. 그 걱정 어린 목소리와 이야기는 택시를 내린 뒤에도 맴돌았습니다. 우리 역시 옛날에 살던 동네에 방문하면 너무 많이 변해버린 모습에 놀라곤 하지요. 어쩌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풍경도 언젠가 추억처럼 자리할지도 모릅니다. 평범한 일상도 먼훗날 그리운 순간이 되겠죠. 오랜 시간 눈에 담고, 또 기록하는 습관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를 더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요.
© 국립중앙박물관
인왕산 초입에 위치한 수성동 계곡은 겸재 정선의 그림 ‘장동팔경첩'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명승지라고 합니다. 우거진 숲과 암반 사이의 계곡을 보고 있으면 서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죠. 제가 방문했을 때는 계곡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물이 말라 있었지만, 비가 많이 온 다음이나 장마철에는 계곡변을 따라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계곡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옛날에는 수성동 계곡에서 수영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창경궁 춘당지에서 아이스링크 마냥 스케이트를 탔었다는 이야기 같았죠. 문화재와 시민들이 경계 없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상상합니다.
수성동 계곡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85-3
하루 동안 종로 일대를 걸어보니, 과거와 현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어우러져 있음을 느낍니다. 또, 보존해야 할 것들이 명확히 보이기도 하죠.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면, 도시관찰자를 따라 종묘에서 서촌까지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공간을 통과한 시간을 살갗으로 느껴 보는 경험은 일상에 새로운 영감을 선사할 거예요.
주말에 방문할 동네에서 꼭 가봐야 할 맛집과 카페, 숍들을 미리 검색하고,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돌아다닐 것인지 최적의 동선을 짜고,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어디를 가든 최소 30분은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된 요즘. 즉흥적으로 돌아다니기엔 기다리기만 하다가 하루를 망치기 십상입니다.
쉬는 것마저 점점 고도의 효율을 추구하게 되는 우리의 일상,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요?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쉬는 일에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사전 계획을 짜진 않았던 것 같은데, 더 이상 ‘목적 없는 어슬렁거림’은 실종된 것 같아 보입니다. 최고의 휴일을 완성하기 위해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동안, 그랑핸드는 빈둥거리는 만보객이 되고자 합니다. 도시를 관찰하는 플라뇌르로서 발견한 장소들을 여러분들께 조금씩 소개해 드립니다.
‘서울’ 하면 어떤 이미지가 생각나시나요? 수많은 맛집, SNS에서 유명한 카페,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핫플레이스 등. 많은 이들이 화려한 서울의 면모를 떠올리지만, 사실 서울은 문화재가 밀집된 지역으로 과거랑 현재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특히 종로에는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 받은 건축물들이 다수 있죠. 그동안 비슷한 방식으로 서울을 즐겨 왔다면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들을 찾아 걸어 보는 건 어떨까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 국내 최초 사진 전문 미술관 뮤지엄한미, 조선시대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수성동 계곡까지. 종묘에서 시작해 북촌-삼청동-서촌 일대를 걸어 봤어요.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 종묘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종묘입니다. 종묘는 조선왕조 500년을 이끈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모시는 사당입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종묘에서 제례를 올릴 때 연주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 역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 받았습니다.
종묘 바로 앞에는 버스 정류장과 종로3가역이 있어서 접근성이 좋은 편입니다. 평일 오전 시간에 방문해서 그런지 관람객이 많지 않았는데요. 알고 보니 종묘는 주말만 자유 관람이 가능하다고 해요. 평일에는 문화재 해설사를 동반한 시간제 관람만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신주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사당인 만큼 그 신성함과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운이 좋게도 시간 맞춰 도착한 별다른 대기 없이 입장할 수 있었어요.
종묘 관람 프로그램은 한 시간 정도의 코스입니다. 입장과 동시에 느꼈던 종묘의 첫인상은 ‘차분함'이었어요. 경복궁, 창덕궁 같은 궐과 달리 단청이 소박하고 전체적으로 고요한 느낌이 감도는 장소였습니다. 초입에는 양쪽으로 작은 못이 방문객을 반기는데요. 가운데에 외딴섬처럼 자리한 곳에는 소나무가 아닌, 향나무가 심겨 있었습니다. 다른 궐에서 만날 수 있는 잉어 같은 어류도 없었어요. 이는 제를 위한 장소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해요. 아마 바깥에서 날아왔을 청둥오리들만 연못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의외로(?) 종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에게 있어선 한국에 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 중 하나입니다. 특히 프리츠커 상을 받고 최근에는 루이 비통 메종 서울을 작업한 해체주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종묘는 세계 최고의 건물 중 하나로,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일본 건축가 시라이 세이이치 또한 종묘를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이라 평하기도 했고요. 세계의 많은 건축 권위가들이 최고로 꼽는 한국의 건축물임에도 정작 국내에선 그만큼의 관심을 받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왕궁터라 그런지, 종묘에는 키가 크고 풍성한 나무들이 가득했습니다. 가만히 숨을 들이마시면 신선한 풀 냄새가 났어요. 시간제 관람이라는 특성 덕분에 해설사를 동반한 저희 팀 외 다른 관람객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엄청난 이점이었습니다. 마치 과거로 되돌아가 아무도 없는 종묘를 거니는 기분이었달까요. 몇백 년 전 제례를 위해 이 땅을 밟았을 사람들의 존재가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현재까지도 종묘에서는 매년 실제 제례가 이뤄진다고 합니다. 문화재 해설사는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종묘 행사를 언급하며 ‘종묘는 죽은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공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종묘를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던 신선한 경험이었죠.
종묘 정전은 무척 특이한 건축물 중에 하나입니다. 고정된 모습이 아닌 세월이 지나면서 그 크기가 점차 커졌기 때문이죠. 사실 처음 지었을 때는 7칸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왕조가 이어짐에 따라 모셔야 할 신위가 많아지면서 그 옆으로 증축을 하게 되었다고 해요. 오늘날 종묘 정전은 19신실이 이어져 있습니다. 제가 방문한 날에는 종묘 정전 보수 공사를 진행중이었는데요. 공사가 끝난 뒤에 방문하신다면 19칸으로 길게 늘어진 웅장한 정전을 감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1969년 복원된 이후로 매년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종묘대제가 진행되니 맞춰 방문해도 좋겠습니다.
종묘에는 알고 보면 흥미로운 포인트들이 많았어요. 유명한 것 중의 하나는 가운데 돌길을 ‘신로'라 구분한 것이죠. 조상의 혼령이 다니는 길이라는 의미로, 보행을 자제해 달라는 안내문이 나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신로를 중심으로 왼쪽은 왕세자, 오른쪽은 왕이 걸었다고 합니다. 돌들이 투박하게 깎여 있거나 계단의 폭이 커서, 보행할 때 바닥을 보고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는데요. 이 또한 의도한 부분이라고 해요.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던 종묘지만, 이 길 만큼은 그 세월을 오롯이 통과해 온 듯 합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곳, 오직 조상을 위해 설계된 곳. 배경을 알게 되니 종묘가 더욱 다채로워 보입니다.
종묘 | 서울 종로구 종로 157
시간제 운용
종묘에서 빠져나오니 어느덧 점심시간입니다. 저는 종묘 옆길인 서순라길을 거쳐 북촌에서 점심을 먹는 경로를 택했어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순라길에는 종묘 돌담을 따라 멋진 레스토랑과 술집, 카페가 늘어서 있습니다. 단층짜리 건물들과 고유의 미감을 머금고 있는 가게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답니다. 특히 가을쯤에는 종묘 안에 있는 키 큰 나무들에 단풍이 들면서 잎을 하나둘 떨구는데,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방문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워요. 서순라길을 빠져나오니 멀리 창덕궁이 보입니다. 고궁과 번잡한 도로가 교차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생경한 풍경이에요. 100년 후 서울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최초, 최고의 사진전문 미술관 뮤지엄한미
북촌에서 25분 정도를 걸으면 뮤지엄한미에 도착할 수 있지만,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버스를 이용하길 추천해요. 정독 도서관에서 ‘종로 11’ 버스를 타고 ‘삼청공원 삼거리’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뮤지엄한미가 있습니다. 주택가 사이에 우뚝 선 뮤지엄한미 건물은 그 외관부터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더할 나위 없지요.
뮤지엄한미는 지난해 12월에 개관한 이래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국내 최초 사진 전문 미술관입니다. 전시는 물론 소장품 수집, 작가 지원사업, 출판 및 교육사업을 통해 미술계와 대중의 관심 밖이었던 사진을 연구·보존하고자 탄생했다고 합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사진사에서 중요한 작품 역시 체계적으로 수집해 사진계의 외연을 넓혀가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제가 방문한 시기에는 아쉽게도 본관 재정비로 인해 별관만 관람할 수 있었는데요. 본관에서는 5월 24일부터 9월 17일까지 윌리엄 클라인의 《DEAR FOLKS》 전시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해요.
© 뮤지엄 한미
윌리엄 클라인은 20세기 현대 사진의 거장으로 불리는 미국 사진 작가로, 기존 사진 문법을 완전히 뒤바꿨다는 평을 받는 인물입니다. 뮤지엄한미에서 진행되는 전시는 윌리엄 클라인의 사후 첫 대규모 회고전이라 그 의미가 남다르죠. 전시와 연계해 1층 개방 수장고에서 뮤지엄 한미의 소장품 중 클라인이 생전에 영향을 받았던 워커 에반스의 사진 작품 20여 점을 함께 전시한다고 합니다. 시각예술의 새 흐름을 선도한 윌리엄 클라인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워커 에반스의 작품을 함께 감상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본관 바로 옆에 위치한 별관에 방문했습니다. 별관에서는 정경자 작가의 개인전인 《다른 면》이 진행 중이었어요. 정경자는 피사체의 일부분을 확대해 촬영하거나 이미지의 색을 제거해 구조적인 형태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을 전개하는 작가인데요.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실재인지 허상인지’와 ‘과거와 미래의 나는 과연 현재의 나와 같은 실체인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구체화한 《Uncanny》 연작들이 준비돼 있었어요.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은 주변에서 마주할 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작가가 창조한 새로운 프레임은 사유를 촉진시킵니다.
일상적인 풍경을 비일상적인 프레임으로 구현된 작품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내포한 듯 보입니다. 섬세하게 표현된 그림 같기도 하죠. 사진이라는 파편은 새로운 시선으로 주변부를 바라보게 합니다. 나무에 가지들이 얽힌 모습, 돌의 투박함과 동시에 느껴지는 고요함, 조형 혹은 패턴 그래픽처럼 자리한 패브릭. 제가 특히 좋았던 작품은 바다 사진입니다. 은은한 윤슬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의 색, 전시장 벽체가 어우러져 완성한 평온한 풍경이 인상적이었어요.
작품은 물론 별관의 건축적인 구조도 무척 매력적이었어요. 3층 한쪽 벽은 통창으로 되어있는데, 공간 전체에 쏟아지듯 번지는 빛과 바깥 풍경이 가만히 바라보기에도 좋았습니다.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루프탑이 등장합니다. 산이 감싸고 있는 듯한 동네의 아늑함이 잘 느껴지는 공간이었어요. 그동안 알고 있었던 종로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뮤지엄한미 청담 | 서울 종로구 삼청로9길 45
수~일 10:00~18:00
시원한 바람이 있는 수성동 계곡
뮤지엄한미에서 택시를 타고 수성동 계곡이 있는 서촌으로 이동합니다. 사진으로는 미처 남기지 못했지만, 택시 안에서 바라본 종로 일대는 무척 낭만적이었어요. 높은 건물이 없어서 그런지 청명한 하늘이 잘 보였을 뿐만 아니라 북악산이 보이는 위치라 자연을 만끽하기에도 좋더라고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청와대와 통인동을 지나 서촌 안쪽으로 진입합니다.
이때 오랜 세월 서촌을 오가셨던 택시 기사님은 더 이상 자신이 알던 도로와 옛집들의 흔적이 없는 것에 대해 한탄했는데요. 그 걱정 어린 목소리와 이야기는 택시를 내린 뒤에도 맴돌았습니다. 우리 역시 옛날에 살던 동네에 방문하면 너무 많이 변해버린 모습에 놀라곤 하지요. 어쩌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풍경도 언젠가 추억처럼 자리할지도 모릅니다. 평범한 일상도 먼훗날 그리운 순간이 되겠죠. 오랜 시간 눈에 담고, 또 기록하는 습관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를 더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요.
© 국립중앙박물관
인왕산 초입에 위치한 수성동 계곡은 겸재 정선의 그림 ‘장동팔경첩'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명승지라고 합니다. 우거진 숲과 암반 사이의 계곡을 보고 있으면 서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죠. 제가 방문했을 때는 계곡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물이 말라 있었지만, 비가 많이 온 다음이나 장마철에는 계곡변을 따라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계곡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옛날에는 수성동 계곡에서 수영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창경궁 춘당지에서 아이스링크 마냥 스케이트를 탔었다는 이야기 같았죠. 문화재와 시민들이 경계 없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상상합니다.
수성동 계곡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85-3
하루 동안 종로 일대를 걸어보니, 과거와 현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어우러져 있음을 느낍니다. 또, 보존해야 할 것들이 명확히 보이기도 하죠.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면, 도시관찰자를 따라 종묘에서 서촌까지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공간을 통과한 시간을 살갗으로 느껴 보는 경험은 일상에 새로운 영감을 선사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