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버스를 놓쳤다.

24 Nov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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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놓쳤다. 


퇴근길, 버스를 놓쳤다. 다음 버스는 35분 뒤라는 전광판 안내에 힘이 쭉 빠졌다. 여기서 마냥 서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순 없다고 생각했을 때, 문득 건너편 책방이 눈에 들어왔다. 제일중고서점. 금방이라도 툭 꺼져버릴 것 같은 파리한 간판 조명이 묘하게 신경 쓰이던 곳이었다. 

책방 문을 열자 투박하게 울리는 종소리와 손 때 묻은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마음 가는 대로 집어든 책들의 대부분은 절반이 한자이거나, 더 이상 만지면 안 될 만큼 수명이 다 한 것들이었다. 힘을 잃은 형광등을 따라 퀴퀴한 책들의 무질서가 이어졌고, 세로로 꽂혀 있는 책들 사이 홀로 가로로 누워 있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잔뜩 얼룩진 겉표지에 중간중간 뜯겨 나간 흔적, 접힌 자국들과 여기저기 적힌 낙서는 삼천 원이라는 가격에도 구매할 엄두를 나지 않게 했다. 시집으로 공부를 했을 리도 만무한데 도대체 무얼 한 것일까?


나도 당신처럼 한 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반 쯤 얇아진 책이지만 나에겐 한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버리지도 태우지도 못하는 이 책이 나에겐 너무 버거워 이 곳에 두고 간다.


시집을 일기장로 쓰다니. 이 책의 주인은 누굴까?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일까? 왜 시집에 이런 글을 썼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기심이 책을 넘겼다. 사이사이 페이지를 뜯은 자국이 있었고, 어딘가에는 의미 없는 반복적인 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이 책에 누군가의 온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흉터들이었다.



<광장>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窓)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네가 피우다 만 담배는 달고 방에 불 들어오기 시작하면 긴 다리를 베고 누워 국 멸치처럼 끓다가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정도의 글귀를 생각해 너의 무릎에 밀어넣어두고 잠드는 날도 많았다 이불은 개지도 않고 미안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지난 꿈 얘기를 하던 어느 아침에는 옥상에 널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별빛을 먹어 노랗게 말랐다



저번 편지는 잘 받았니? 이 시집은 내가 정말 좋아해서 항상 가방에 가지고 다니는데, 이러다 너에게 모든 페이지를 주고서 나에겐 책등만 남게되는 재밌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좋겠지.


운 좋게도 재미있는 책을 집었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시를 노래하고 있었고, 시집의 주인은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지극히 사적인 비밀을 발견해 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버스 도착까지는 5분. 나도 모르게 반에 반으로 접힌 천 원짜리 지폐 세 장을 내밀고 서둘러 시집을 구매했다.



<낙서> 

… 저는 밥집을 찾다 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 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메뉴를 한참 보다가 김치찌개를 시킵니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봅니다. 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 넣다 말고 여자와 말다툼합니다. 조미료를 그만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 더 넣어야지 맛이 난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 넘칩니다. 몇 번을 더 버티다 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 조미료통을 닫았고요. 금세 뚝배기를 비웁니다. 저를 계속 보아오던 두 사람도 그제야 안심하는 눈빛입니다. 휴지로 입을 닦다 말고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잔뜩 낙서해 놓은 분식집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



이런 미래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던 날도 있었지. 이제는 늘 한결 같기를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이기심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을 좋아해. 마음이라는 것이 언제나 똑같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뜯기지 않은 페이지, 완결되지 못한 문장. 편지가 되지 못한 채 남겨진 글은 자신에게 쓰는 다짐에 더 가까웠다. 사람의 눈빛이 제철인 봄날, 찌개 냄새 가득한 분식집 부부 같은 삶을 꿈꿨던 책 주인의 불안한 희망이 마치 나의 일처럼 쓰리게 다가왔다. 방 안이 온통 눅눅한 감정들로 가득 찼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뜯긴 몇 장의 흔적을 넘겼다. 편지가 적힌 페이지는 마지막을 향하고 있었다.



<해남으로 보내는 편지>

오랫동안 기별이 없는 당신을 생각하면 낮고 좁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울음이 먼저 걸어 나오더군요. …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땅 황토라 하면 알 굵은 육쪽마늘이며 편지지처럼 잎이 희고 넓은 겨울 배추를 자라게 하는 곳이지요. 아리고 맵고 순하고 여린 것들을 불평 하나 없이 안아주는 곳 말입니다. 해서 그쯤 가면 사람의 울음이나 사람의 서러움이나 사람의 분노나 사람의 슬픔 같은 것들을 계속 사람의 가슴에 묻어두기가 무안해졌던 것이었는데요. 땅끝. 당신을 처음 만난 그곳으로 제가 자꾸 무엇들을 보내고 싶은 까닭입니다. 



2013. 4. 13. 토요일



도장처럼 새겨진 그때의 날짜와 함께 기록은 여기서 끝이 났다. 다음날, 나는 다시 서점을 찾았다. 남의 사랑 이야기를 잘도 훔쳐보고 나 혼자 갖고 있기엔 책 주인의 첫 메모처럼 책이 너무 무거웠다. 둘의 사랑에 방해꾼이 된 느낌이랄까. 그들은 지금쯤 각자가 선택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이 시집의 존재도 잊은 채 다른 삶을 노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과 아무 관계없는 나만이 이미 지나간 과거에 멈춰 머물고 있다. 주변을 힐끗 둘러보고 원래 있던 자리에 책을 그대로 눕혀 놓고는 서점을 나왔다. 마치 삼천 원짜리 긴 꿈을 산 기분이었다.


Sometimes you win, 

Sometimes you lea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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